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십자군 원정 (문단 편집) == 다마스커스 공략 == [[파일:e0040579_0153787.jpg]] 독일, 프랑스, 예루살렘의 세 왕이 내린 결정. 한편 십자군 최대의 적이었던 장기는 갑작스런 최후를 맞았다. 평소 그의 거칠고 엄격한 성격에 불만을 품었던 노예가 술에 취해 잠든 장기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고 만 것이다. 장기의 사망 소식을 듣고 에데사의 조슬랭 2세는 에데사를 탈환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지만 실패했다.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일명 누레딘)은 보복으로 에데사의 기독교도들 중 남자는 죽이고 아녀자는 노예로 팔아 버렸다. 안티오키아의 레몽과 조슬랭의 관계는 여전히 나빴고 다들 십자군이 오기를 학수고대했다. 하지만 성지에 도착한 십자군은 대부분이 아나톨리아에서 죽고 소수에 불과했다. 에데사 탈환은 어림도 없을 판이었다. 그래도 루이 7세는 많은 자금과 기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안티오키아의 레몽은 누레딘이 모술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과 다투는 틈을 타서 알레포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금욕적인 성향의 루이 7세는 으스대는 미남인 레몽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계획에도 시큰둥했다. 레몽은 자신의 조카인 엘레오노르를 대신 설득하려 했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히 숙질 관계가 아니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당연하지만 루이 7세는 매우 불쾌해했다.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에게 알레포를 공격하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했고 격노한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를 연금시켜버린 다음 예루살렘으로 떠나버렸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루이 7세는 프로방스에서 도착한 십자군을 보충받아 다시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한편 콘라트 3세도 용병들을 고용하여 다시 군세를 회복한 상태였다. 여기에 예루살렘 왕국 군대가 합세하면 실로 엄청난 숫자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원래 목표인 에데사 탈환은 모두 관심이 없었다. 알레포를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은 루이 7세가 이미 거부한 바가 있고, 결국 그들은 엉뚱하게도 예루살렘의 우방인 다마스커스를 쳤다. 누레딘의 딸이 다마스커스의 아타베그와 결혼한 것이 예루살렘을 자극한 것이다. 그리고 새로 온 십자군들은 이교도와의 동맹 따위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1148년 7월 24일에 다마스커스 공략이 시작됐다. 그리고 7월 28일에 공격이 끝났다. 도시를 빨리 점령하기 위해 십자군은 안전한 위치를 포기했고 이슬람 군대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 다음에 일어난 일이 참 훌륭한 하이개그인데, 물과 그늘이 있는 자리를 버리고 고지로 올라가자, '''물과 그늘이 없어 사기가 개판 5분전'''이 된것을 보고 원래의 주둔지로 다시 이동하기로 했는데, 고지로 주둔지를 옮겼던 그 사이에 '''누르 앗 딘 군대가 이미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에도 마속이...--.[* 적어도 원정군은 지리를 몰라서 그랬다고 쳐도--지리 파악 하지 못한것도 훌륭한 개그감인건 넘어가고-- 마속이 십자군보다 더 등신같은 점은 왕평이 고지대로 올라가지 말라고 심하게 말렸다.]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아니 예루살렘의 우방을 적으로 돌리고 십자군은 회군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